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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솔직함을 동력 삼아 탄생하고 공유되고 주장하는 이미지 속에서

 

카메라로 일상을 수없이 기록할 때, 나중에 제외되는 이미지의 갈림길은 시각적으로 명확하냐 명확하지 않으냐에 달려 있는데, 흥미롭게도 인터넷상에서 우리는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블러, 손 흔들림, 초점이 왔다갔다 하는 이미지—를 쉽게 받아들인다. SNS 피드나 데이터로 저장되는 카메라 앨범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다면,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기록한다는 전제하에, 손 흔들림 때문에 블러가 생기거나 초점 나간 이미지가 현실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 이미지 중에는 확대와 편집, 심지어 조작까지 거쳐서 설득력을 키운 것도 있다. 다루는 방식에서 삭제되고 유통될 때 제외되는 이미지는 다른 공간으로 이송되어 순환적으로 재활용된다고 보기 힘들다. 내 저장공간에서 빠진 이미지가 SNS 공간에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력이 다른 결과로 할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 동력이란 바로 이미지의 확산력이다.

이미지의 확산력은 세 가지 속성을 지닌다. 하나는 확산 자체의 힘, 다음으로 확산되기 쉬운 이미지를 만드는 힘, 마지막으로 이미지를 다루는 주체에 그럴듯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힘이다. 인터넷상으로 확산하는 현장 기록이나 밈(meme) 같은 경우에는 (일명 ‘제목학원’처럼) 나도—말 그대로—한마디 해주고 싶은 이미지나 지목되는 챌린지처럼 퍼지고, SNS 내 계정에서 매끈하고 반듯하게 정리된 타임라인이나 피드는 그 이미지를 곧 계정주(개인이나 기업이나 연예인이나)의 이미지로 연결한다. 이미지의 확산력은 솔직함의 바탕 위에서 한쪽에 허례허식을 다른 한쪽에 진실을, 그리고 그 중간에 농담과 비아냥을 위치한다. 솔직함을 내세워서 치장된 이미지, 솔직함을 정직함이나 올바름의 증거/증표로서 간직하는 이미지, 그리고 이 중간에서 우직하게 나온 말 또는 말 같지 않은 말들로서 나타나는 이미지가 있다.

 

이 바탕에서 이미지는 언제나 과도기적이다. 이미지를 내가 편집하거나 조작할 때는 물론, 시각적으로 변함없는 경우에도 이미지를 둘러싼 의미가 변화한다. 심각한 사건의 한 컷마저도 웃기는 이미지로, 타임라인 정리가 곧 이미지화된 성격을 보여주고, 밈이 회사의 발언으로 동원될 때, 나고 자란 이미지는 다른 곳으로 다른 이미지로서 심어진다. 장승근의 이번 개인전 «ᄊᆞ이버 펑크»에서 감상자는 이미지의 확산력을 주제로 파악할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인터넷상에서 작가와 우리를 포함한 모두가 그간 친숙하게 접해온 모티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라는 주제, 캡처된 화면이라는 소재를 보면 혹자는 “인터넷상의 풍경을 그렸다”라고 당장 말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때 ‘풍경’이란 어떤 의미에서 풍경일까? 어떤 일이 있었고 지금은 없는 장소가 “~~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라는 밈과 공명할 때,  인터넷상의 풍경은 그의 작품에서 단순히 재현할 대상인 밈이나 저장한 이미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작가는 이미지로서의 재현을 허구나 허상으로만 성립시키는 대신, 반복적인 생산을 통해서 인터넷상의 풍경을 그린다. 예컨대 <Assemble>(2021)처럼 중첩된 아이스버킷 챌린지 이미지의 사람 얼굴이나 “~~이 아니다”라는 부정형이 연속되는 <나 ___ 아니다>(2021)를 보면 반복적인 생산은 작가의 표현 방법뿐만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유통되고 확산하는 이미지의 속성임을 알 수 있다. 앞서 본 이미지의 확산력은 그의 작품에서 같은 이미지나 다른 이미지끼리 중첩되거나 블러, 그리고 복수화를 통해서 과도기적 성격을 포착한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은 특정 인물임이 불명확한데, 궁극적으로 ‘무엇을 무엇으로서 특정하기’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앞서 본 예시에 이어, <Easy on Humans, Hard on Bots>(2021)에서 가운데에
명령조로 나와 있는 ‘움직이라’라는 (move) 문구가 적절하지 않으면 ‘다시 움직이라=제거한다 (remove)’ 라는 명령 또한 시사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누구의’ 초상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어느 누구라 칭하지 못하는 익명성과 동시에 특정 수식어나 개념으로 구분 및 분류할 때 발생하는 역학 관계를 부각한다.

 

나타난 이상 그것은 이미지인데, 어떤 이미지라 부르는 순간 취득하게 되는 권력과 입지를 표명하기를 납작하게 다루어 궁지에 빠뜨린다. 정치적이건 비-정치적이건 이미지는 솔직함의 지평에서 쉽게 위치 변경될 위험을 감수한다—<Easy on Humans, Hard on Bots>에서 중앙으로 움직이라는 말은 결코 절대적인 중립으로 여길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표명이나 주장, 부정, 명령을 통해서 탄생하고 다루어지는 이미지는 증거라는 진실로 온전히 귀속하기만 하지 않는다. 과도기적 성격은 끝을 어디로 향할까? 저장된 링크에서 ‘복붙’되어 다른 위치로, 타임라인에서 모음 사이트로 이동하면서 시리즈물이 되는 지점까지, 그 성격은 계속 유지된다.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개인과 집단 모두 이미지를 다루고 생산하며 동질화할 때 이미지의 확산력의 끝을 누구도 모른다.

그림이 어떤 재현을 한다면 장승근의 작업은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는 이미지의 존재 방식인 확산력을 재현한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반응에 다시 응하듯이 반복적인 표현을 통해 시각화한다. 중첩되어 가려지거나 복수의 형태로 나오고 블러가 생긴 이미지는 반듯하고 말끔히 (불필요한 것이 제거되어) 정리된 이미지의 음화(negative)가 아니라 이미지의 확산력이라는 같은 힘에서 나온 다른 결과일 뿐이다. 전시 «ᄊᆞ이버 펑크» 에서 ‘사이버 펑크’는 한때를 그리워하듯이 등장하는 시각적 모티프가 더는 아니다. 이미지를 향한 그리움은 본향적인 귀속 욕구뿐만 앞을 향해 개진하고자는 욕망으로, 심지어 그 중간에 부유하는 ‘아무말’—“왠지 사이버 펑크하고 좋네” 같은 말—에 숨쉰다. 솔직함에 뒷받침되는 바탕에서 과도기적 이미지는 그 사이사이의 연관 관계, 바꿔 말해 잇달음의 관계성 대신 연쇄적 또는 무차별적으로 건너뛴다. 작가가 그린 인터넷 상의 풍경은 끊임없이 오가는 이미지의 지평에서 언제 진심에서 재미, 그리고 허구로, 앞-뒤 또는 ‘좌-우’로 넘어갈‘지도 모르는’ 지점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때는 다 넘어가지 않았다. <Kitsch man>과 <New Face>(2021)에서 위장술인지 자신을 표명하는지 단번에 보(기만 하)고 식별 불가능한 가면은 사연 있는 장소가 볼거리가 된 풍경과도 같이, 솔직함의 바탕에서 이미지를 과도기적으로 다루어 보여준다. 미래나 과거를 몰입하듯 그리워할 때, 혹은 농담이나 개그로 쉽게 소비하고 넘어갈 때, 공통적으로 이 바탕의 심층에서 요동치는 것은 불안이다. 장승근의 작품은 모든 솔직함을 동력 삼아 탄생하고 공유되고 주장하는 이미지 속에서 요동치는 불안을 끄집어 보여준다. 불안, 그것은 이미지가 겪는 길인 동시에 이미지에 내비치고 기대하는 우리의 심층일지도 모른다.

 

-글 콘노 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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